어제 혼란스러웠던 이유
토요일에 만난 상대가 너무 좋았거든 정말
로맹 가리와 폴 오스터를 알고 비포 선라이즈라는 영화를 추천하는 사람
마치 주혁이 같은...
어쩌면 주혁이보다도 더할 거야
주혁이는 권여선은 몰랐잖아
이 사람은 내가 말하는 모든 책과 모든 작가를 다 알아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이 어떤 거냐길래 비행운이라는 단편집을 읽다가 이야기들이 다 우울해서 앞의 3편만 읽고 중단한 상태라는 이야기를 했더니 '김애란 작가!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그 문장이 인상 깊었어요' 이러고 바로 튀어나옴
영화도 마찬가지고
내가 영상보다 책을 더 선호한다고 했더니 영상은 아예 안 보는 거냐, 마지막으로 본 영화가 뭐냐고 묻길래 작년에 파이란이라는 영화를 본 게 마지막이라고 했더니 '최민식 나온 거? 강재씨 고맙습니다 저랑 결혼해주셨으니까요' 하고 영화 대사가 또 바로 튀어나옴
대화하면서 정말 많이 놀랐어
책, 영화, 음악 다 엄청 많이 알고 있고 그런데 그걸 주혁이처럼 잘난듯이 이야기하지 않고
이런 문학적인 부분들도 좋았는데 이 사람의 배려심이나 세심함도 너무 좋았어
내가 케이크를 먹다가 식탁에 흘려서 닦으려고 휴지를 집었거든
그런데 그걸 내 손에서 자연스럽게 가져가더니 본인이 닦아주더라고
제가 할게요 주세요 이랬으면 별로였을 텐데 그 말없는 일련의 행동들이 굉장히 자연스러워서 이런 사람이구나 싶었지
주혁이는 내가 음식 흘리면 추저분하게 이러고 꼽 줬는데...
그래서 주혁이 좋아하면서 자존감이 엄청 떨어졌었어
물론 주혁이가 진심으로 뭐라고 한 게 아니란 걸 알아
나도 주혁이를 좋아하지 않았으면 속으로 뭐 시발 이러고 말았을 거야
그런데 주혁이를 좋아하는 마음이 스스로를 갉아먹더라고
여튼 다시 원래 주제로 돌아가서 그 사람하고 대화를 하다가 지지난주에 코로나에 걸렸던 때의 이야기를 했거든
제가 평일에는 항상 운동 가는 걸 아니까 만나자고 안 하는 친구인데 웬일로 만날 수 있냐고 묻더라구요. 저도 그 친구가 웬만한 일로 만나자고 안 하는 거 아니까 바로 오케이하고 싶었는데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중요한 일이냐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남친하고 헤어질 거라고 헤어지고 연락할 테니까 만날 수 있냐는데 차마 거기에 대고 몸이 안 좋으니까 다음에 만나자고 못 하겠는 거예요. 그래서 어쩌고 저쩌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 사람이 그러더라고
그 친구가 남친하고 헤어지겠다는 이유는 중요하지 않죠 이후에 그 친구가 ㅇㅇ씨에게 어떻게 했는지가 중요하죠
이 말을 듣는데 머리가 띵한 거야
주혁이는 내 이야기를 듣고 친구 커플에 대한 말만 5시간을 했는데 이 사람은 내 감정에 집중하고 거기에 공감해주는구나 싶었어
그동안 내가 주혁이에게 얼마나 의미 없는 존재였는지 느껴졌지
그렇게 즐거운 토요일을 보내고 바로 다음 날인 일요일에 저녁 약속을 했어
그랬는데 같이 드라이브 가지 않겠냐고 연락이 와서 1시에 만나서 드라이브 하고 산책하고 카페 가고 저녁 먹고 헤어짐
그런데 분명 엊그제는 이 사람이 너무너무너무 좋았는데 어제는 갑자기 내 마음이 확 식은 게 느껴지는 거야
당황스러웠어
분명 이 사람이 너무 좋았는데 주혁이보다도 더 좋아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하고 너무 당황스러운 거야
원인이 뭘까 이 생각 저 생각 머릿속이 빙글빙글하다가 일단 자자하고 잔 뒤에 오늘 아침에 일어나니까 약간 머릿속이 정리됨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아래 3가지야
1. 도파민 중독이라서
>> 이미 토요일 만남으로 충분한 도파민이 충전됐기 때문에 더 이상의 도파민이 필요 없는 거지 나는 연애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도파민이 필요한 것 뿐이야
2. 자존감이 낮아서
>> 무의식 중에 나는 별로인 사람인데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네? 뭐야 이 사람도 별로인 사람인가 보네 하고 마음이 식음
3. 주혁이와 비교되어서
>> 마찬가지로 무의식 중에 주혁이는 나 안 좋아했는데 이 사람은 나 좋아하네? 뭐야 주혁이보다 별로인 사람인가 봐 하고 마음이 식음
2와 3은 비슷해 보이지만 미묘하게 달라
셋 중 어느 이유가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생각들을 하다가 문득 깨달았어
작년에 열흘 정도 사귀었던 상대하고 헤어진 이유도 이거였구나 하고
그때 상대에게 내가 지금 회사일도 힘들고 개인적으로도 힘든 일(주혁이 짝사랑 중)이 있고 그래서 지금 연애를 할 상황이 아닌 것 같다고 했고 스스로도 그렇다고 믿었거든
그런데 아니야
작년에 금방 헤어진 것도 썸탈 때는 좋았다가 막상 상대하고 사귀게 되니까 마음이 식어서 그래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맞아
그래서 여기서 또 하나 의문이 생겼어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에 주혁이가 내 마음을 받아주면? 그러면 주혁이를 향한 마음도 식을까 싶더라고
그러면 그게 주혁이를 좋아하는 게 맞나? 지금 내 마음은 그냥 집착 아닌가?
모르겠어 모르겠어
머리가 아프다...